여의도에서 우연히 들어간 칵테일 바가 기억에 남는 이유

여의도에서 우연히 들어간 칵테일 바가 기억에 남는 이유

퇴근길에 무작정 들어갔던 그곳

사실 계획하고 간 건 아니었다. 여의도에서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유난히도 습하고 더운 날이었다. 땀이 등 뒤로 조금씩 배어 나오기 시작하니까 지하철역으로 바로 내려가기가 싫어지더라. 그냥 어디든 에어컨이 빵빵하고 조용한 곳으로 숨고 싶었다. IFC몰 근처를 서성이다가 평소라면 그냥 지나쳤을 골목길 사이로 은은한 조명이 새어 나오는 바가 보였다. 평소에 분위기 좋은 술집을 찾아다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그날따라 왠지 모르게 저런 곳에서 혼자 시간을 좀 보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게 이름은 기억도 잘 안 난다. 그냥 M29였나, 어디 호텔 루프탑이나 근처 바였던 것 같은데 메뉴판을 보니 칵테일 한 잔에 보통 2만 원에서 2만 5천 원 사이였다. 여의도 물가가 다 그렇지 싶으면서도, 막상 주문하려고 하니 머뭇거리게 되는 가격대였다. 배가 고픈 건 아니어서 안주는 시키지 않았는데, 기본으로 나오는 견과류 접시가 조금 텅 빈 느낌이라 내심 조금 당황했다. 그래도 창밖으로 보이는 야경이 꽤 괜찮아서 위안을 삼았다.

칵테일 한 잔에 들어가는 시간들

바텐더가 셰이커를 흔드는 소리가 생각보다 컸다. 조용한 음악이 흐르는 공간이라 그런지 챙- 하는 얼음 소리가 유난히 날카롭게 들렸다. 내가 시킨 건 시그니처 메뉴 중 하나였는데, 이름이 굉장히 길고 난해해서 대충 추천해주는 걸로 골랐다. 사실 위스키 베이스의 칵테일이면 다 비슷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한 입 마셔보니 생각보다 훨씬 독해서 놀랐다. 도수가 꽤 높았던 것 같다. 몇 번 홀짝거리다 보니 머리가 살짝 띵해졌다.

옆자리에는 퇴근 후 바로 온 것 같은 정장 차림의 남성 두 분이 조용히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무슨 심각한 업무 이야기를 하는지 표정들이 아주 무거웠다. 저 사람들도 나처럼 이 공간에서 잠시 현실을 잊고 싶은 걸까. 아니면 여기서도 업무의 연장선인 건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괜히 내 잔만 휘저었다. 가끔 한남동 쪽에 있는 위스키바에 가보면 거기는 조금 더 묵직하고 어두운 느낌이었는데, 여기는 통창 너머로 여의도의 빌딩 숲이 보여서 그런지 약간 더 차가운 느낌이 들었다.

주방에서 일하던 짧았던 시절의 생각

술을 마시다 보니 갑자기 예전에 아르바이트했던 식당 주방 생각이 났다. 그때는 정신없이 접시 닦고 재료 손질하느라 칵테일 한 잔의 여유는커녕 물 한 모금 마시는 게 소원이었다. 화려한 바 뒤에서 묵묵히 잔을 닦고 재료를 계량하는 바텐더를 보고 있으니, 저 사람도 집에 가면 씻고 바로 기절하겠지 싶었다. 겉으로 보기엔 참 우아한 직업 같아 보이지만, 사실 주방이나 바나 다 똑같이 육체노동의 연속일 텐데. 문득 내가 손님으로 앉아있는 이 자리가 조금 낯설게 느껴졌다.

가격 때문인지, 아니면 분위기 때문인지 한 잔을 다 비우고 나니 딱히 더 시키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보통은 더 머무르면서 다른 메뉴도 보고 그러는 게 정석인 것 같은데, 그냥 딱 한 잔만 마시고 일어나는 게 깔끔해 보였다. 바텐더가 계산서를 가져다주는데, 생각보다 서비스 차지나 뭐 이런 것들이 붙어서 처음 생각했던 예산보다 몇 천 원 더 나왔다. 그래도 뭐, 이 정도 공간을 빌린 비용이라고 생각하면 아주 억울할 건 없었다.

그날 밤의 모호한 잔상

나오자마자 마주친 여의도의 밤공기는 여전히 뜨거웠다. 에어컨 바람 아래 있다가 나오니 갑자기 훅 하고 덮쳐오는 열기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칵테일의 알코올 기운이 식도 끝까지 타고 내려가는 게 느껴졌다. 지하철역으로 걸어가면서, 도대체 나는 오늘 왜 혼자 술집에 들어갔던 걸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특별한 맛을 기대한 것도 아니고, 대단한 대화를 나눈 것도 아닌데 말이다.

아마도 그저 어디든 좋으니 정지된 공간에 잠시 멈춰 서 있고 싶었던 것 같다. 가끔은 이렇게 목적 없이 돌아다니다가 전혀 예상치 못한 곳에서 시간을 보내는 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다. 다만 다음번에 또 오게 된다면, 그때는 굳이 칵테일 바가 아니라 좀 더 편한 국밥집 같은 곳을 찾을지도 모르겠다. 여의도의 빌딩 숲 아래서 마셨던 그 칵테일이 무슨 맛이었는지 지금은 정확히 기억도 나지 않지만, 그날의 습도와 셰이커 소리만큼은 이상하게 아직도 귓가에 남는다. 굳이 이게 좋은 경험이었는지, 아니면 그저 시간 낭비였는지 결론을 내릴 필요는 없겠지. 그냥 그런 밤도 있었던 거다.

댓글 3
  • 셰이커 소리가 생각보다 크더니, 위스키 베이스 칵테일이 그렇게 높아서 깜짝 놀랐네요. 저도 가끔 예상치 못한 도수의 술 마실 때, 다음엔 좀 더 주의해야겠어요.

  • 제가 생각하는 건, 칵테일 대신 땀처럼 시원한 국밥이 더 끌렸을 수도 있다는 거예요.

  • 칵테일 가격이 좀 부담스럽게 느껴지네요. 저는 새벽에 이런 분위기의 곳을 방문하면 오히려 더 술 생각이 안 나더라고요.